왜 이 소설을 읽어야 할까?

nodee

2019-02-08

소설 <작전명 서치라이트 : 비랑가나를 찾아서>

작년 말 <작전명 서치라이트 : 비랑가나를 찾아서>(이프북스, 2018)라는 방글라데시 소설이 한국어로 발간됐다. 이 책은 방글라데시의 1971년 독립전쟁 당시 강간 피해 여성들, ‘비랑가나’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전쟁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그린 다큐 소설이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역사 속에서 한 줄, 두 줄로 취약되어버린 이름 없는 수십만, 수백만 명을 위한 진혼곡이다.

상당수의 비랑가나가 ‘침묵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침묵하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리고 샤힌 아크타르는 이 소설에서 바로 그 침묵을 언어로 바꿔서 우리에게 전달한다. (p.8, 옮긴이의 글 중)


침묵하는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

비랑가나의 삶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이지만, 전쟁의 문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주인공 매리엄의 삶을 통해 대의명분을 내세운 국가가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쟁과 국가의 폭력 속에서 보호받기는커녕 여성들은 2중, 3중으로 참혹하게 학대당하고 짓밟혔다. 식민지배와 지독한 빈곤, 차별로 억압당했던 이들은 참혹한 전쟁을 경험해야 했고, 독립 이후에는 ‘새로운 국가 건설’, ‘명예’, ‘혁명’, ‘경제성장’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되고 착취당해야 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삶은 국가에 의해 때론 전시되고 자극적으로 소비되다가 지워졌다.

“그들은 우리에게 헝겊 쪼가리를 입도록 만들거나 우리를 강간한 것뿐만이 아니다. 나에게는 매번 군홧발로 찬 거, 총검으로 찌르며 매번 재촉한 거, 담뱃불로 지진 거 모두 다 똑같이 끔찍했다. 그중 어떤 것도 정상적이지 않다.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덜 끔찍한 것이 없다. 방글라데시 국가는 오로지 우리가 밤낮으로 몇 번씩 강간당했는지나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다른 고문은 고문으로 치지도 않는다.” (p.127-8)


낯선 문화, 불편한 진실

책을 읽은 이들은 하나같이 책장을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낯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그들이 입는 옷과 먹는 음식의 이름까지… 생활 속에서 소소하게 반복되며 쓰는 단어조차도 생소하다.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두리뭉실 명확하지 않은 시적인 표현, 거기다가 독립전쟁 직전부터 이후 30여 년의 방글라데시의 현대사까지 담고 있으니 처음에는 책장을 넘기다 앞으로 돌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투키의 아기는 사산되었다. 그녀는 바닥에 있던 자루 조각으로 아기를 싸서 방 한구석에 놓았다. 바로 그날 군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투키는 말한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나는 살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무언가 먹을 것을 주면 먹었고 주지 않으면 굶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미친 여자처럼 살았습니다.” (p.185)

 

인간이 만든 전쟁 속에 인간은 없었다

‘전쟁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일까?’

전쟁 속의 그녀들을 만나는 일은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그야말로 진저리가 나도록 끔찍했다. 읽다 쉬다를 반복하며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어 제주 4.3, 한국전쟁과 독재 정권하에 희생되었던 수많은 사람들과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을 떠올리며 이들의 삶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실제로 방글라데시 전체 수출의 80%를 차지하며 방글라데시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섬유산업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한국’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우리가 거쳐온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세이크 무집)는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파키스탄의 총리가 되는 꿈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그는 국민에게 모든 가정을 요새로 만들고, 생생히 살아 있는 운동을 유지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 야햐, 부토와 함께 대통령 궁에서 마치 물고기를 사듯이 흥정과 거래를 하고 있다. (p.43)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소설은 자신의 권세를 위해 민중을 희생양으로 삼은 지도층을 비판한다. ‘독립’만 외칠 줄 알았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했던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전쟁과 기근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수백만이 희생당하고 수천만이 삶의 터전과 기반을 잃어버렸음에도 그들의 실패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남자나 여자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적과 싸워야지요.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에 일어났습니다. 자유투사 동료 샤라파트가 나를 속이고 창녀촌에 데리고 가 팔아먹은 것입니다.” (p.182)

 

영웅이 되거나 창녀가 되거나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은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여자들은 ‘창녀’로 불렸다. 소설에서는 성적 학대를 당한 비랑가나에게 쏟아진 2차 피해, 형식 치레 치러지는 전범재판과 허울뿐인 비랑가나의 재활 프로젝트, 장례식조차 치를 수 없는 ‘비랑가나’들의 처지를 언급하며 피해자인 그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사회의 잘못된 통념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어느 날 투키가 입을 열었다.

“창녀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나는 창녀였던 적이 없는데, 내 인생은 뭐예요? 평생 처녀로 남았는데 내가 얻은 게 뭐예요?”
“누가 처녀야?”
“왜? 나요. 언니는 두 번이나 결혼했잖아요? 내가 결혼했어요?”
“그렇지만 너는 부대에서 아기를 낳았잖아?”
“그래서 뭐요? 내가 그때 남편이 있었어요? 아니면 애를 원했어요? 그건 그냥 학대의 결과일 뿐이에요.”

예상 밖의 반응에 매리엄은 투키에게 여자는 그녀가 원했든 또는 원치 않았든 상관없이 아이를 낳으면 더는 처녀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것은 그 둘 사이에 틈만 벌어지게 만들었다. (p.499)

 

왜 이 책을 읽어야 할까?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안타깝지만, 그들만의 문제라고…’, ‘우리 삶도 지금 충분히 각박한데, 다른 나라의 과거까지 신경 쓸 여유 따윈 없다고…’, ‘전쟁을 담은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아픔이 우리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외면해선 할 수 있을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채, 아름다움만을 담을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책을 덮었지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졌다.

지구촌 곳곳에서 반복되는 비극들을 살펴보면, 무섭도록 닮은꼴을 하고 있다. 전에 어떤 글에선가 ‘누군가가 치른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이라고 ‘자신이 가해자이자 수혜자임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전쟁 이후 태어난 우리는 과거의 일이라서,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서는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이웃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서는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른 척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알려하지 않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진심으로 안전한 국가나 사회 속에서 개인이 보호받고, 개개인이 ‘각자도생’을 외치는 외로운 삶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고 가는 삶, 더불어 행복한 사회 속에서 살길 바란다.

그렇기 위해서는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공감해야 한다. 과거의 아픔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반복되는 비극의 장소가 다음은 우리가 있는 그곳이 되기 전에….

 

덧붙이는 글 | 이포스팅은 DAP LS에도 중복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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